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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17 12:55
신년 대토론회 "통합의 정치와 합의제 민주주의" 손학규 상임고문 기조 강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35  

'통합의 정치와 합의제 민주주의'


한국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최대 과제는 사회적으로 양극화와 분열을 해소하고 정치적으로 극심한 대결구조를 혁파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대결주의는 대통령의 절대 권력이 승자독식의 정치구조를 만든 87년 체제의 정치적 속성에 기인합니다.

87년 민주화의 핵심적 과제는 대통령 직선제와 정치 안정이었습니다. 국민이 직접 뽑은 대통령에게 권력을 집중해서 정치 안정을 기하고 정치 안정을 통해 경제 발전, 안보, 사회통합을 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자리 잡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사회가 다원적으로 발전하고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집단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양당제에 기초한 대통령 중심제는 더 이상 정치적 안정의 기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국회와 정당정치는 승자독식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극한적인 대결의 장이 되었고 정치는 만성적인 불안정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87년 민주주의 체제는 이제 극복의 대상입니다. 이 체제가 부추겨온 승자독식-패자전몰의 극한 경쟁 상황이 지속되면서 대결과 증오는 이미 우리의 정치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정치체제가 계속되는 한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인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우리 국민을 타협과 합의의 장으로 모을 수 있는 통합의 정치체제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는 승자독식 체제가 아니라 합의제 민주주의체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의제 민주주의는 갈등이 없는 사회를 전제로 하거나 그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체제가 아닙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거친 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각종 이해관계를 둘러싼 사회갈등이 분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문제는 사회갈등이 있다는 게 아니라, 그 사회갈등을 조정하고 관리할 정치시스템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피할 수 없는 이 다양한 사회갈등을 잘 조정하고 관리하여 사회통합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당들이 바로 서야 합니다. 정치의 사회통합 기능은 주로 정당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요한 사회적 갈등과 균열은 정당체제를 통해 정치적 갈등과 균열로 전환돼야합니다. 그리하여 정치권 내에서 정당 간의 대화와 타협으로 그 갈등이 조정될 때 비로소 사회통합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당체제로 가기 위해서는 국회의원 선거제도가 개혁돼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독일식 비례대표제, 즉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가장 적합한 개혁모델로 생각됩니다. 계층비례성과 지역대표성을 동시에 보장해주는 선거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도 좋은 제도로 여겨집니다. 석패율 제도를 적극 도입하면 지역적 편향성을 절감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와 다당제의 발전은 현행 헌법 하에서도 연정형 권력구조의 운영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국회에 상시적으로 셋 이상의 유력정당들이 존재하여 통상적으론 어느 한 정당도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기 어렵게 된다면 대통령은 여소야대로 인한 난국상황을 피하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펼치기 위해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례대표제에 더하여 대통령 결선투표제까지 도입된다면 연립정부의 구성은 더욱 수월해질 것입니다. 더구나 현행 헌법에는 내각제적 요소도 가미되어 있습니다. 국회의 국무총리 임명 동의권, 국무총리 해임 건의권, 국무총리의 각료임명 제청권 등이 제대로 행사되기만 해도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의해 다당제가 자리 잡으면 대통령의 권한은 국회에 의해 상당 부분 견제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합의제 민주주의는 헌법 개정을 통해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등으로 개편할 때 제도적으로 완성됩니다. 우리 헌법의 내각제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고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 부를 통할하는 위치에 한정되기 때문에 완전한 권력분점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해야 한다는 국민적 정서가 아직 강력하게 존재하고, 정치적 안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강해서 내각제 개헌이나 당장의 이원집정부적 개헌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 저는 내각제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했고, 개헌 그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내각제는 일본의 경우에 비추어 상시적 정치 불안정을 가져올 염려가 있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당파적 색채가 강한 정치성격상 심한 당파주의에 의해 끝없는 정쟁과 정치 불안이 이어질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의원내각제는 재벌에 휘둘리는 정치가 될 염려가 크다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또한 개헌 논의 자체가 흔히 정략적인 의도로 제기되는 것을 보아 온 저로서는, 제도를 탓하기 전에 정치관행과 올바른 리더십의 확립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성적인 대결주의와 정치적 갈등이 날로 심화되는 현실 속에서 제도적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특히 작년에 독일에 연수생활을 하면서 생각을 다시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합의제 민주주의를 통하여 안정된 정치 속에 복지국가와 경제적 번영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이 정치 안정이 독일의 통일과 통일독일의 안정적 번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독일은 내각제를 채택하면서도 1949년 서독 정부 수립 이래 65년간 오직 8명의 수상만 배출하는 등 놀라운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습니다. 독일의 정치적 안정과 성공적 사회통합의 배경에는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기초로 한 다당제와 이를 바탕으로 한 연립정부 체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연립정부를 통한 정책의 연속성이 독일의 사회적 통합 뿐 아니라 독일 통일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 저의 관찰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치 안정과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제도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선거제도 개혁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개헌에도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질적인 대결주의와 증오의 정치를 극복하고 사회통합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헌 논의가 블랙홀이 되어 경제살리기에 올인해야 할 시점에 개헌 논의는 적절치 않다고 말했지만 정치권에서는 개헌논의가 이미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개헌은 결코 서둘러서는 안 될 일입니다. 의원내각제가 좋을지 분권형 대통령제가 좋을지, 만약 분권형 대통령제로 간다면 대통령과 총리 간에는 어떻게 권력을 나눌지 등은 특정 정치가나 학자 혹은 어떤 집단이 자의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을 전제로 풀어야 할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중지를 모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광범위한 공론의 장을 개설할 것을 제안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개헌 논의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 마당에서 충분한 공론의 검토를 거쳐 권력구조 개편안이 도출되도록 해야 합니다.

보다 급한 것은 선거제도의 개혁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국 정치의 핵심 문제는 정당체제의 후진성입니다. 사회갈등의 주요 주체들이 정치적 대표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작금의 인물과 지역 중심 정당체제를 그대로 둔 채 권력구조만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등으로 전환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개악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명망가나 소지역 중심의 지역할거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지역정당들 혹은 그 보스들 간의 정권 나눠먹기 양상이 만연되면서 권력구조는 결국 정치엘리트들 간의 과두체제로 전락할 공산이 큽니다.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과 같이 이념, 가치, 정책 중심의 온건 다당제를 견인하는 선거제도의 도입이 선행돼야합니다. 권력구조의 개편은 그 후에 이루어져야 다양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여러 정당들이 권력을 분점함으로써 그들 간의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갈등이 정치적으로 조정돼가는 진정한 합의제 민주주의가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대토론회가 87년 체제를 넘어서서 복지국가와 통일한국의 미래를 열어가는 새로운 정치의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