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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04 16:13
'최고의 연단'의 빈자리 / 로버트 라이쉬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79  

‘최고의 연단’의 빈자리


로버트 라이쉬

(UC Berkeley 교수, 전 노동부 장관)


우리는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나는 워싱턴(정치)의 최악을 이미 보았다고 여겼다. 나는 워터게이트 직후 그 곳에 있었다. 나는 카터 정부가 스스로 무너져갈 때 그곳에 있었다. 또 나는 1995년 정부 폐쇄 동안에도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최악을 본 것은 아니었다. 이번이 최악이다.


9%를 상회하는 실업률, 일자리 창출의 중단, 불평등의 확대, 실질 임금의 하락 그리고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경제를 목도하면서, 어떻게 우리는 재정적자를 줄일까에 대한 전투에 갇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부분적으로 근래 들어 가장 무책임하며 또 이념적으로 경직된 공화당에서 찾을 수 있다. 또 부분적으로는 대불황(Great Recession)의 지속적인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은 대통령에게 있다. 미국인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필요한 과제에 대해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최고의 연단(bully pulpit)를 사용하는 데 있어 그의 무능 또는 회피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는 지금까지 백악관에 입성한 이들 가운데, 가장 지적인 웅변가이다. 그 사실이 우리 시대의 이야기 전달에 있어 그의 실패를 더욱 실망스럽고 어리둥절케 만든다. 나를 포함해 2008년 선거에서 그에 빠져들었던 이들은 무엇보다 그의 말의 힘과 통찰력 -2004년 전당대회 연설, 그의 자서전과 정책집 그리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인종과 다른 논쟁적 이슈에 대한 그의 연설-에 압도당했다.


우리는 (시민을) 교육할 수 있는 지도자, 지난 수십년에 미국에 무슨 일리 일어났고, 우리는 어디로 왜 가야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최고의 연단을 사용할 최고 교육자(educator in chief)의 등장에 흥분했었다.

그러나 2009년 1월 백악관 집무실을 차지한 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분명한 방향감각도 없이, 하루는 오른쪽으로 다음날은 왼쪽으로 오가는 책략가였으며, 더 큰 목표의 관점에서 자신의 타협을 설명하지 않는 워싱턴 정가에 전형적인 협상꾼에 불과했다.


그의 취임연설에서, 오바마는 “국가가 오직 부유한 이들만 편애할 때, 국가는 부유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사석에서 그는 “최상층으로의 부와 소득의 집중의 가속화는 국민경제가 전진하는데 필수적인 중산층의 구매력을 강탈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정치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는 “대불황이 7조 8천억 달러에 달하는 부동산 가치를 날려버렸다는 것을, 그것이 미국 중산층에게 실질 임금의 하락 속에서도 소비를 가능케 한 유일한 자산이자 담보였다는 점을, 이렇게 줄어든 소비가 경기회복을 더욱 더디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실을 미국 시민들에 설명하는 대신 ‘재정적자 감소’라는 물신숭배(fetish)를 만들어 내는 공화당에 합류했다. 그리고 부채한도(debt ceiling) 인상 여부를 둘러싸고 공화당 의원들과의 살벌한 치킨게임에 빠져들었다.


단 한 번도 그는 미국 대중들에게 왜 적자감소가 그의 경제정책의 제일 우선과제가 돼버렸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미국인들은 즉 “적자감소가 어찌어찌해서 경제성장과 일자리를 되살릴 것”라는 공화당의 답변만을 갖게 되버렸다.


우리는 백악관으로부터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 대신, 진부하고 고리타분한 설명만 받았다. 오바마가 미국은 “미래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회기반시설, 교육, 기초 R&D 에 대한 공공투자의 증대를 의미했다. 그런데, 국내총생산 대비 비중으로 볼 때 지난 반세기 통틀어 가장 낮은 수준으로 비-국방 분야의 재량적 지출(앞서 언급된 투자의 재원이 되는)을 삭감하는 예산안을 제출했다.


만약 지지자들이 왜 대통령이 그럴 수밖에 없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의 타협은 용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적옵션을 포함하지 않은 의료보호 법안, 월스트리트 은행의 규모를 제한하지 않은 금융개혁법, 심지어 메디케어나 사회보호 예산의 축소까지도. 이 모든 것들은 현실정치의 필요성의 견지에서 용인될 수 있다. 단 그것은 대통령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때만 가능한 것이다.


왜 오바마는 ‘최고의 연단’을 사용하지 않는가? 아마도 그는 워싱턴에서 정책결정을 가능케 하는 전술적 기동에 지나치게 휘말렸는지 모른다. 다음 전투를 위한 정치적 자본의 보전을 지나치게 염려한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혹은 미디어가 어떻게 그의 메시지를 평가 또는 왜곡할지에 대해 냉소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는 소란을 돌파하고 더 큰 목표를 추동하는데 요청되는 반복을 피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모든 것들에, 적어도 한동안은, 굴복했던 대통령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일했었다 ※클린턴을 의미)


보다 더 당혹스러운 설명은 그는 단순히 진실을 말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투사보다는 책임감 있는 성인으로써 보이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출발에서부터 환경을 만들어가는 리더가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이성적 대응을 제출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 스스로를 위치시켰다. 가장 최근의 상황이 바로 부채-상한을 둘러싼 총체적 난국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오바마가 진실을 내세워 시민들의 힘을 모을 수 없는 까닭은, 지배적 견해에 계속해서 순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리더십이 아니다.


<출처>

http://robertreich.org/post/8149639042 (2011.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