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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04 16:17
피로는 '간'때문이 아니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9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다


신영전 / 한양대 교수ㆍ사회의학


1847년과 48년 가을에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가난한 프러시아(지금의 독일) 북부 슐레지엔(실레지아)에 발진티푸스가 유행하였다. 상황이 너무 악화되자 사회적 혼란을 두려워한 독일 정부는 외부 전문가를 선임하여 이 유행병의 원인과 개선책을 만들어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 책임을 맡은 사람은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병리학 강사로 있던 당시 26살 피르호였다. 3주간의 조사를 마치고 그는 300쪽이 넘는 역사적인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의 보고서를 요약하면 이 반복되는 발진티푸스의 유행은 발진티푸스 ‘균’ 때문이 아니라 이 지역의 ‘궁핍’과 ‘저발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유행병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여성들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시키는 교육, 자유와 복지, 그리고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페텐코퍼라는 학자는 질병이 단지 균만으로 발생하지 않고 영양, 주거상태, 더 나아가 정치·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시대 지배 권력은 파스퇴르와 코흐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창궐하던 콜레라, 결핵 등이 ‘열악한 생활과 노동조건’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한 페텐코퍼보다는 이른바 파스퇴르나 코흐처럼 결핵은 ‘결핵균’에 의해 야기된다는 식의 설명이 그들에게는 더 고마웠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광주의 한 공장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던 김아무개군이 쓰러져 5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으나 현재까지도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고 한다. 한 특성화 고등학교의 학생이었던 김군은 주야간 맞교대와 격주 주말특근 등 주당 평균 54시간을 근무했다고 한다. 미성년자가 하루 8시간, 주당 46시간을 넘길 수 없는 근로기준법 위반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열악한 작업환경과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은 김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한겨레신문> 12월27일치 1·8면)


어디 현장실습 학생뿐이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93시간(2010년)으로 회원국 중 가장 길며, 이는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네덜란드보다 무려 816시간이 더 길다.


일반 국민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인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7시간49분으로, 이 역시 오이시디 조사국 중 가장 짧고, 하루 평균 8시간50분을 자는 프랑스인에 비해 무려 1시간을 덜 자고 있다. 각종 경쟁과 사설학원으로 내몰리는 우리 청소년들의 수면시간 역시 하루 평균 7시간 반으로, 미국·영국·핀란드보다 1시간이나 적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학교 수업시간은 피로를 풀고 사설학원의 수업을 듣기 위해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잠이 부족하면 피로할 수밖에 없다. 일의 효율도 오르지 않는다. 하물며 강압과 욕설, 열악한 작업 조건 아래서 이루어지는 초과근무는 피로를 넘어 각종 질병과 사고의 원인이 된다. 최근 정부 산하 한 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보면, 초과 근로시간 1시간의 감소가 재해율을 0.04%를 낮추며, 뇌혈관 질환과 과로사·돌연사 등 업무상 질병 발생자의 대부분이 발생 전 초과근무를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김군 사건은 취업률 숫자 채우기에만 급급하고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가 만들어 내고 있는 많은 사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 불법 노동에 대한 강요가 학교 끝나면 피시방으로 친구들과 놀러가고 싶어할 어린 학생에게 이루어졌다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다. 그가 빨리 회복하여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요즘 이른바 ‘뜨는’ 광고문구 중 하나가 “피로는 간 때문이야”라고 한다. 우연하게도 이 말은 160여년 전 상위 1%가 좋아했던 “결핵의 창궐은 ‘열악한 노동조건’ 때문이 아니라 ‘결핵균’ 때문이야”라는 말과 너무 닮아 있다. 피르호가 오늘 한국에 온다면 그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피로는 ‘간’ 때문이 아니다. 모든 국민을 이 피로함에서 풀어줄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이들을 위한 복지, 그리고 진정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