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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5-04 16:17
용띠 해에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꿈꾸다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8  

용띠 해에 ‘개천에서 용 나는 사회’를 꿈꾸다

유종일 /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임진년 새해가 밝았다. 언론에서는 임진년이 흑룡의 해라고 호들갑을 떠는데, 흑룡이든 백룡이든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올해가 민룡(民龍)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백성이 용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용이 될 수 있는 기회만큼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한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개천에서 태어나도 용이 될 수 있는 기회는 가져야 한다. 기회의 공정은 정의로운 사회의 최소 필요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균등은 좌우 이념을 떠나 누구나 동의하는 원칙이다.


흔히 우파는 기회의 균등을 주장하고 좌파는 결과의 평등을 주장한다고 한다. 기회만 공정하게 주어졌다면 본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가 아무리 불평등해도 이를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우파의 입장이고, 사회통념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나친 불평등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시정하여야 한다는 것이 좌파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회의 공정성 혹은 기회균등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이 두 입장 사이의 차이는 거의 소멸하고 만다. 공정한 기회가 단지 누구에게나 경쟁할 자격이 형식적으로 주어진다는 것만이 아니라 경쟁을 준비할 최소한의 여건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심각한 결과의 불평등은 곧 기회균등의 원칙에도 위반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결과가 노력과 상관없이 동일하다면 노력해야 할 유인이 사라진다. 필자는 북한에서 우연히 철로 작업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대다수 노동자들이 도대체 무슨 작업을 하는 것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어영부영하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혁명 초기에는 소위 혁명적 낭만주의에 의해 열심히 일할 유인이 유지될 수도 있지만 이는 결코 오래갈 수 없다. 우리는 사회주의 실험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주의적 분배 혹은 재분배만 열심히 일할 유인을 파괴하고 효율성을 갉아먹는 것은 아니다. 부의 대물림도 본인의 노력과 상관없이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사실 기회균등은 추상적 개념으로서 그 자체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기에 흔히 부의 대물림 정도 혹은 세대 간 소득계층의 이동성을 간접적인 지표로 삼는다. 부모의 소득이 자식의 소득을 결정하는 정도가 크다면 그만큼 불공정한 사회이고 그 정도가 작다면 그만큼 기회균등이 보장된 사회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기회균등을 측정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매우 중요한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한 시점에서의 소득불평등도가 낮을수록 부의 대물림 정도가 낮아지고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이 커진다는 것이다. 덴마크, 핀란드 등 북유럽국가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반면 미국이나 영국처럼 소득불평등도가 큰 나라들은 부의 대물림도 심하고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이 매우 낮다. 흔히 미국이 유럽에 비해 불평등은 심해도 더욱 역동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세대 간 계층이동성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분배의 불평등이 “개천에서 용이 날” 가능성마저 축소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지적한 대로 오늘의 분배는 내일의 경쟁을 준비할 여건으로 작용하고, 부모의 소득은 자식에 대한 투자를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분배의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정치과정에서 중하위 소득계층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부유층의 입김이 강화된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제도와 정책이 부유층과 그들의 자식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 바로 이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소득불평등의 심화, 계층이동성의 저하, 부유층에게 유리한 제도변화 등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서울대 합격자 중 서울의 일반고 출신 중에서 강남·서초·송파 3구 출신이 무려 42.5%인 데 반해 구로·금천·마포 3구 출신은 불과 2.7%였다. 2009년에 신규 임용된 판사의 37%가 강남과 특목고 출신이었다. 고교다양화정책, 입학사정관제도, 로스쿨제도 등 새로 도입되는 정책과 제도들은 부유층과 그 자녀들에게 유리한 것들 투성이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기회가 공정한 사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경제민주화와 보편적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 1%를 위한 제도와 정책을 폐기하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는 방향으로 국정운영의 철학과 담당세력을 바꿔야 한다. 총선과 대선이 모두 치러지는 임진년이다.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도 구조화된 불평등과 제도적 결함은 존재한다. 그러나 민이 힘을 합쳐서 나라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民)이 용이 되는 길이다. 올해가 진정 민룡(民龍)의 해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