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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4-18 15:58
【 손학규 상임고문 】 다원적 민주주의와 정치체제의 개혁 -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말하다(Ⅳ)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2  
2023. 4. 18
기조연설

다원적 민주주의와 정치체제의 개혁

손  학  규
동아시아미래재단 상임고문


내일은 4.19혁명 63주년 기념일이다. 4.19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뿌리다. 4.19는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고,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을 거쳐 1986년에는 6월 항쟁으로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 이후에도 2016년 촛불시위로 정권을 교체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런 가운데 대한민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였고, 세계 최빈국과 군사독재의 오명을 벗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선진국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경제는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발전 이래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무역적자가 13개월 이어지고 성장은 정체되어, IMF는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해서 1.5%까지 내려 잡고 있다. 세계 유수의 투자은행(IB)들은 한국의 경제성장율을 1% 이하로 전망하기까지 한다. 미·중 패권전쟁 속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 등 전략산업의 공급망 재편을 위해 자국보호주의 정책을 펴면서 우리나라 첨단산업의 미래가 불투명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경기 침체와 공급망 재편의 움직임 속에 국내적으로도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어 한국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무역적자뿐 아니라 경상수지도 연이어 적자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국가부채는 2,300조를 넘어서고 가계부채의 급격한 증가는 서민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작년도 0.78이라는 세계최저의 출산율 행진은 우리나라의 장기적 성장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할 한국 정치는 진영 싸움에 매몰되어, 전략산업에 대한 입법과 재정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반도체및과학법,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등을 통해 반도체 등 첨단산업 유치에 열을 올리고, 일본과 유럽에서도 현금 지원과 감세 정책으로 대응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반도체 등 국가전략기술을 지원하기 위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 이른바 K-칩스법이 국회에서 한참 낮잠을 자다가 3월 31일에야 통과되었고, 그것도 외국에 비하면 상당히 제한된 범위다. 모두 여야 간 정쟁 때문이다. 

진영 정치, 패거리 정치, 팬덤 정치로 규정되고 있는 한국의 정치는 민주정치의 요체인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극한대결로 갈등만 부추기고 있으며, 오직 포퓰리스트 경쟁에만 치중하고 있다. 국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야당은 다수당의 횡포로 양곡관리법 개정과 같은 무리수를 두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하고, 간호사법 등과 같이 대화와 타협이 없는 일방적 강행을 시도하고 있다. 야당 대표는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으며, 국회는 당 대표 체포동의안을 거부하기 위한 방탄용으로 개회를 지속하고 있다. 

다른 한편,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은 야당을 상대도 않고 있다. 대한민국과 같이 정치가 극단적으로 분열되어있는 나라에서는 국론의 통합이 가장 중요한 과제다. 국론통합을 위해서는 대화가 우선인데 여·야 간에 만남 자체가 없다. 야당의 이재명 대표가 형사 기소된 상태에서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만나기를 꺼린다고 하더라도, 국무총리나 대통령 비서실장, 특히 여당의 대표나 원내대표 등 여당의 지도부는 야당의 중요 인사들과 만나야 한다. 만나서 한일 관계, 한미 관계, 대중 관계,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지원, 노동 개혁 등 국정현안에 대해 대화를 하고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정치가 대화와 타협이 아닌 대결과 갈등으로만 점철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현상만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서도 갈등과 분열은 이제 정치의 본 모습이 되어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불복에 이은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은 미국 민주주의의 난맥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최근에 트럼프를 형사범죄 혐의로 기소하여 재판에 회부한 것은 미국의 정치적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 또한 대통령제와 양당제로 양극단의 대립과 갈등 속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이에 따른 경제발전으로 사회가 더욱 다원화되고 이해관계도 다양화되고 있다. 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이해 집단이 공존할 수 있는 다원화된 정치체제가 필요하다. 현대 민주주의가 다원적 민주주의를 기본원리로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이 모두 자유롭게 태어나고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라면, 이러한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용인하고 사회를 조화롭게 통합하여 평화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이 다원적 민주주의의 원칙인 것이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에서는 권력의 독점을 최대한 배제한다. 제왕적 전제주의와 귀족적 봉건주의의 권력 독점이나 과점은 물론이고, 전체주의나 권위주의의 권력 횡포도 거부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를 위한 사회, 정치 운동이 민주화 과정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도 야당을 용인하고 대화와 타협을 했으며, 민주화 이후에는 여·야 협력으로 경제발전과 한반도 평화를 추구해 왔다.

이제 세계 경제 10대강국으로 성장해서 선진국의 위치에 오른 대한민국은 다원적 민주주의 체제로 정치적 전환을 해야 한다.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양당에 치중된 권력을 다원화하여 다양한 이해관계를 정치에 수용해야 한다. 대통령제의 폐지가 당장 불가능하다면 의회의 권력을 다원화해서 대통령의 권력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이것이 정치체제 변혁의 첫걸음이다.

다당제의 도입은 헌법 개정 이전이라도 가능하다. 다당제를 통해 연합정치의 길을 열어 거대양당의 극한대결을 극복해야 한다. 국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 때문에 길거리로 나가고 소셜미디어로 정치적 욕구를 발산하는 우중 정치로부터, 대의정치를 거부하는 팬덤정치로부터, 대중을 구해 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중대선거구 제안을 하면서 선거구제 개편론이 탄력을 받았지만, 정당과 정치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쉽게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구제 개편은 의회정치 거부와 민주주의 카오스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18년 제가 열흘간 단식을 하며 쟁취했던 연동형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이 비례위성정당 창당으로 실패한 쓰라린 경험을 다시 반복해서는 안 된다. 4.19를 맞이하여,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성공적으로 이뤄 세계만방에 대한민국의 명예를 드높인 민주주의 정신이 다시 우뚝 서기를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