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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7-08 13:00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초청 강연 (2015. 6. 1)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617  
   다산 정약용의 개혁사상.hwp (24.0K) [0] DATE : 2015-07-08 13:34:10

茶山 丁若鏞改革思想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교수)

 

. 茶山生涯

實學者, 思想家, 詩人으로 호칭되는, 우리 민족의 자랑인 茶山선생은 조선 후기의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磻溪 柳馨遠星湖 李瀷學風을 이어받아 實學을 집대성한 學者였다. 그는 1762년에 태어나 75세인 1836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死後에 오히려 더 유명해진 분이다. 그가 남긴 與猶堂全書를 포함한 많은 遺著들은 500여권이 넘는 大著, 이 나라 學問思想寶庫로 전해지고 있다.

"一表二書"로 전해지는 經世遺表牧民心書그리고 欽欽新書등은 천하 국가를 경영하는 政策資料로 제공되기를 著者 자신이 바랐던 바였기에 요즘처럼 정책의 빈곤이 선연한 때에는 더욱 값지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茶山晉州牧使를 역임했던 丁載遠남으로 京畿道 廣州郡 지금의 南楊州市 조안면 능내리 마재에서 태어나, 뛰어난 총명과 탁월한 實踐力으로 어려서부터 글 잘 한다는 명성이 높았다. 15세에 서울의 洪氏宅으로 장가들어 서울의 문물에 접하며 친구들을 사귀고, 그 이후 星湖 李瀷遺著를 통해 학문에 뜻을 두게 되어 본격적인 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22세에는 經義科를 통하여 進士가 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28세에는 文科 第二人으로 합격하여 벼슬에 오른다. 그 때는 한창 政治改革이 논의되던 정조시대여서 임금의 총애를 받던 茶山의 장래는 매우 밝기만 하였다. 翰林, 玉堂을 거쳐 暗行御使承旨, 參議를 역임하였고 谷山都護府使를 지내며 마음껏 牧民之道를 펴기도 했으나 진즉 손을 떼었고 마음에서 끊었던 天主敎徒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여 벼슬길이 끊기고 18여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전라도 강진 땅에서 유배살이를 해야만 했었다.

40세에 시작된 유배살이는 57세에 끝이 났으나, 다산은 오히려 그러한 不運을 딛고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민족 최고의 학자로 위치하게 되었다. 57세에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 아래 자서전 격인 자찬묘지명으로 二本을 지어 자신의 일생을 정리하였으며, 유배시절의 학문에 대한 마무리 작업을 벌여 제대로 정리해 놓고 18해째인 7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茶山民權意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엽에 살았던 다산의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의식은 당시 時代에 비교해서는 대단히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측면이 너무 많았다.

특히 그의 民權意識은 대단히 색다른 바가 많아서 오늘의 민권사상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부면이 있었다.

권력의 所從來를 밝힌 그의 유명한 논문 原牧이라는 글을 살펴보자. “목민관은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서 있는가. 백성들이 곡식과 옷감을 생산하여 목민관을 섬기고 또 탈 것과 사역자들을 내어 목민관을 전송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정말로 목민관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否否).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철저한 爲民思想을 설파하였다.

또 그는 마을 사람이 추대하여 里正을 세우고, 의 상위개념인 에서 추대하여 黨正을 만들고, 고을 사람들이 추대하여 州長을 만들고 여러 州長들이 한사람을 추대하여 國君이라 하였으며, 여러 들이 모여서 方伯을 추대하고, 사방의 들이 한사람을 추대하여 皇王이라 하였으니, 따지자면 皇王(天子)의 근본은 里正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백성을 위하여 목민관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백성을 괴롭히거나 목민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군주는 백성의 힘으로 추방할 수 있다는 혁명적인 湯論은 더욱 흥미로운 주장이다.

대저 天子의 지위는 어떻게 해서 소유한 것인가? 하늘에서 떨어져 천자가 된 것인가. 그 근원은 이러하다. 다섯 집이 1이고 5에서 장으로 추대된 사람이 里長이 된다. 51이고 5에서 추대된 사람이 縣長가 된다.

또 여러 현장들이 다 같이 추대한 사람이 제후가 되는 것이요. 제후들이 다 같이 추대한 사람이 천자가 되는 것이고 보면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설파하여 결론으로는 ()왕이 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옮은 일인가? 이것은 옛날의 를 답습한 것이요, 탕임금이 처음으로 열어 놓은 일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뛰어난 다산의 혁명론은 바로 東洋정치의 시작부터 행해진 일이라고 증거를 보이며 주장했던 이론이었다.

다음으로 다산이 牧民官이 되어 자신의 주장인 原牧湯論의 사상을 어떻게 실천하였는가를 살펴보자.

이계심(李啓心)이라는 사람은 谷山의 백성이었다. 지난번의 원님 때에 아전들이 속임수를 써서 포보포(砲保布) 40() 대금으로 900전을 받아들였다.(본래는 200). 백성들이 원망하여 소란스럽게 떠들자, 이계심이 우두머리가 되어 천여 명을 이끌고 관아로 쳐들어와 항의하였으니, 외쳐대는 소리에 과격한 내용이 많았었다. 원님이 처벌하려고 하자 천여 명이 일시에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계심을 둘러싸며 대신해서 벌을 받겠다고 청하니 끝내 계심에게 벌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전이나 관노들이 몽둥이와 장대를 들고 관아에 모인 백성들을 난타하자 백성들의 대부분이 흩어져 나가고 계심도 빠져 나와 도망해서 숨어버렸다. 원님이 황해도 감사에게 보고하자 五營을 내려 체포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붙잡지 못하였다.

한양에는 와전되어 전해지기를, 곡산의 백성들이 초거에다가 원님을 떠메고 가서 客舍 앞에다 던져버렸다는 소문이다. 마침 곡산부사로 떠나려고 두루 인사를 다니던 참이어서, 정승 김이소(金履素)등 여러분들이 모두 전하기를 주동자 몇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채제공(蔡濟恭)도 기강을 위해서라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곡산지방으로 들어가자 어떤 백성 하나가 탄원서를 손에 들고 길을 가로막기에 누구냐고 물었더니, 바로 이계심이었다. 그의 탄원서를 받아서 펴보았는데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12조목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계심에게 뒤를 따르도록 하였다. 아전이 말하기를 계심은 오영에서 체포하도록 수배령을 내린 죄인입니다. 법대로 하자면 의당 붉은 노끈으로 묶고 목에 칼을 씌워 따르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다산은 그냥 두게 하였다. 관아에 당도하자 다산이 이계심을 불러 앞으로 오도록 하여 말하기를, ‘한 고을에 반드시 너 같은 사람 하나가 있어 형벌에도 겁내지 않고 죽음에도 두려워하지 않아야만, 백성들이 그들의 억울함을 풀게 된다. 千金은 얻을 수 있으나 너는 구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오늘 너를 무죄로 석방한다.’라고 하고는 불문에 부치게 되었다. 이러 하자 백성들의 억울함이 풀려서 여론이 잠잠해졌다.(俟菴年譜36세조)

* 강연 전문 파일 첨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