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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8-20 11:41
손학규의, 정치가 아닌, 진짜 정치는 지금부터다.
 글쓴이 : 풀빛
조회 : 214  

영화감독 박찬욱의 영화 '올드보이'는 임상수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완결 편이자,그의 후속작인

'친절한 금자씨'를 위한  영상논리를 제공해 준다. 박정희독재 십팔년동안 만두만 먹고 살아온 한국인들은 

영화 올드보이의 최민식에게는 공감하지 못하고, 한때의 박정희를 상징했던 명량 이순신의 최민식에게

천만관객을 헌상하고 있다. 만약에 올드보이가 없었다면,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는 있을 수가 없었다는

점에서 진짜 칸의 감독상은 친절한 금자씨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박감독은 자신의 가문인 박정희시대에 먼저 침을 뱉고 나서, 후속작을 통해 현재의 한국 민주정치를 풍자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칸의 심사위원들은 너무 성급하게 올드보이에게 상을 준 것이다.) 

 

친절한 금자씨야말로 박정희시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광분했던, 양김시대에 대한 야유로 가득차 있다.

국민들앞에서,역사앞에서,신앞에서는 정치적 복수를 하지 않겠노라던 양김세력은, 결코 인간 전두환,노

태우를 눈앞에서 용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연희동과 망월동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나름대로

열심히 화해와 용서를 실천한 독재자의 딸에게 청와대를 내어주고 말았는데,이제 십팔년의 기억속에서 쓴

물처럼 들이켜야 했던,원숭이엉덩이같은 새빨간 거짓말의 일상과 향연을,한국인들은 다시 되풀이 감상하

고 있다.


(역사적 부채에도 이자가 붙는 것 같다. 화해와 관용이 없는 민주주의가, 절뚝거리며 시간만 허송하는

동안,민주세력과 산업세력이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며,북촌과 봉하마을사이라는 새로운 역사적 부채가

복리로 따블링되었다.)

 

역사에는 뛰어넘어갈 수 없는 강물이 있는 법이다. 생략할 수 없는 과정을 뛰어넘던 한국사회는,마침내

종말론적 변침의 연발탄속에 시달리면서, 지구 반대쪽 우루과이옆동네출신 교황의 따끔한 방문을 통해,

자기자신의 민낯을 세계인들앞에 들키는 사태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종말론적 침몰속에서 끓어올랐던 손학규의 정치은퇴선언은,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부르고 있다. 전두환,노태우시대와 함께 야누수의 두얼굴처럼 태동한 386의 전성시대도 저물고 있다. 

그 야누스의 얼굴은 한쪽은 피해자의 모습으로,다른 한쪽은 가해자의 얼굴로 역사에 남았다. 한국정치

의 민낯은, 죽어서도 피해자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의 얼굴보다 부끄럽다.

 

결론적으로 손학규의, 정치가 아닌, 진짜 정치는 지금부터인 것 같다.